버려지는 파지사과로 제품개발, 귀촌인 지속가능 생업 제공
사과 테마 커뮤니티 카페 열고 사과酒·사과 발효음료 선보여
올해 3월 타계한 프랑스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영화감독 아그네스 바르다의 2000년作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쓸모없는 것, 쓰레기’로 분류된 것들을 주워 생계를 해결하거나 예술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을 포착한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영화 속 그들은 수확이 끝난 밭에 상품성이 없어 나뒹구는 농산물을 채집하거나 쓰레기통을 뒤지며 생활하는데, 뜻밖에도 그들이 건진 음식이나 물건들은 여전히 쓸모가 있고 싱싱하기만 합니다. 이들의 삶의 방식은 단순히 생계를 잇는 것만이 아닌, 현재의 대량생산·대량소비 사회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었던 셈입니다.
<강원도 사회적경제 이야기>도 우리 곁에 이삭줍는 사람들을 찾아 양구를 찾았습니다. 양구 국토정중앙천문대와 길 하나 두고 마주한 사과 테마 커뮤니티 카페 ‘CAMINO-까미노’입니다. 친환경 양구사과를 매개로 지역 농부와 도시에서 귀촌한 사람들의 지속가능한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는 구심점이자, 사과를 이용한 제품을 연구하는 연구소이기도 합니다.
이들이 줍는 이삭은 ‘파지사과’입니다. 고교 동창생인 강정현, 권무령아 두 대표는 몇 해 전 양구로 귀촌한 후 일손을 돕기 위해 방문한 지역 사과농가에서 조그만 흠집 때문에 출하되지 못한 채 썩혀나가는 사과 무더기를 발견했습니다. 상품성 좋은 제수용 사과를 따는 것만도 벅찬 농가에게 조금이라도 흠이 있는 사과를 가공하거나 번듯하게 치우는 건 엄두도 못 낼 일 인 겁니다. 친환경 사과를 재배하는 자부심 강한 농가는 조금이라도 하자가 있는 본인들 상품이 시장에 돌아다니길 원하지 않았으니, 말 그대로 농장 한편에 버려지고 있었죠.
양구 귀촌자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며 귀촌인들이 농촌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거나 지속가능한 생업을 일으키기 어려운 현실을 타개할 방안을 고민하던 두 사람에게 번뜩!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버려지는 파지사과를 활용해 양구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이 지역과 어우러져 행복하게 생활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길이 있지 않을까?”
사과즙이나 말랭이 등 기존 가공품에 머무르지 않고, 사과를 많이 사용하면서도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상품을 고민하던 이들이 착안한 아이템은 바로 ‘애플 사이더(Apple Cider)’입니다. 프랑스에서는 ‘시드르’라고 부르는데 포도농사가 어려웠던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과 영국을 중심으로 와인을 대체하기 위해 만든 사과 발효주입니다. 유럽, 특히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시드르의 날’이 있을 만큼 아주 오래전부터 대중적인 주류로 널리 음용하고 있고, 동아시아에서는 일본과 홍콩 등에서 이제 막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하네요.
우리나라는 일본을 통해 단맛이 강하게 나는 탄산음료인 사이다로 소개된 탓에 사이더의 세계가 더 낯설게 느껴지는데, ‘까미노 시드르 연구소(2019년 사회적기업가 육성사업 창업팀명-이하 까미노)’ 팀은 프랑스에 거주한 경험이 있는 강정현 대표의 제안으로 국내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던 시드르의 세계에 입문할 수 있었습니다.
강정현, 권무령아 대표를 포함한 양구 귀촌자 커뮤니티 회원들은 시드르 연구를 본격화하며 애플시드르 워크숍을 진행하는 영국 사과농장에서 투숙하며 본고장의 노하우를 배우거나 시드르를 만드는 일본 사과농장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귀국 후에는 문경과 충주 등 국내 유명 양조장을 찾거나 직접 파지사과를 100% 착즙 발효시킨 저알콜 시드르를 만드는 연구 활동을 지속했습니다.
그러나 버려지는 지역의 자원을 활용해 지속가능한 지역 선순환 경제를 이루고픈 까미노의 길이 평탄치만은 않습니다. 인생이 순례의 여정이라며, ‘순례자의 길(camino de peregrinación)’에서 따온 까미노의 이름값을 하는 걸까요? 귀촌인이다 보니 지역민들에게 설명을 해도 관심을 얻기 어렵고, 맛을 보게 해도 일제 잔재인 주정 희석 소주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을 설득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까미노에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양구군이 공개 입찰한 천문대 앞 건물을 낙찰 받게 된 거죠. 2년여 간 주인을 찾지 못한 채 반복되는 유찰로 비워졌던 공간은 너른 데크와 푸르른 야외 공원을 품은 까미노 커뮤니티 카페로 탈바꿈하게 됐습니다. 강정현, 권무령아 두 대표는 이 공간이 시드르와 까미노를 널리 알리는 구심점으로 활용되길 바라며 지난 2월 14일 카페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또 일손 돕기로 인연을 맺은 친환경 사과농가와는 파지사과 수매 협약도 체결했습니다.
다만, 카페 공간을 열게 되면서 기존 사업 내용은 조금 바뀌게 되었습니다. 규모 있는 공장시설이 필요한 과실주 제조업의 높은 문턱으로 인해 시드르는 면허 취득 때까지 체험프로그램으로 돌리고 대신 비알콜 음료인 콤부차와 워터 케피어를 개발해 제조·판매하고 있습니다. 특히 콤부차는 사과를 넣어 2차 발효하기 때문에 시드르 면허 취득 전에도 파지사과를 많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짜르르한 자연 탄산음료와 곁들여 먹는 프랑스 가정식 메밀요리인 ‘갈레뜨’는 까미노 시그니처 메뉴로, 지역 농산물과 평창 메밀로 만든 프랑스식 전병입니다. 포도농사가 어려운 척박한 땅에서는 밀 대신 메밀을 경작해야 했는데, 이 메밀로 만든 갈레뜨는 또 시드르와 찰떡궁합입니다.
강정현 대표는 “커뮤니티 카페는 까미노가 처음부터 기획해서 만든 공간이 아니었는데 창업공간으로, 시장진입의 창구로 다양한 사람들 만나는 매개공간이 되었어요. 양구사과향토사업단과도 유대가 생겨 함께 사과 디저트 레시피를 개발해보자는 제안도 받았고, 양구군청이나 농업기술센터에서도 관심을 가져주시고요. 주말에는 저희 사업에 관심 있는 분들과 파지사과를 발리고 착즙하는 체험도 진행했어요. 양구 ‘박수근미술관’ 입주 작가로 계신 분은 파쇄하고 즙을 짜낸 찌꺼기로 작품을 만들어 보겠다는 재밌는 제안도 주셨어요”라며 카페 공간으로 맺어진 인연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권무령아 대표는 “요새 드는 생각은 지금까지 저희가 고민해 왔던 걸 삼삼오오 알리고 싶어요. 적과 시기가 지나면 사과농가들을 초대해서 시드르 체험을 함께 해보려고 해요. 양구에 사과농가가 250곳이 있는데 그 중 몇 곳이라도 시드르를 만들어 본 경험을 떠올려 파지사과로 우리 농가만의 시드르를 만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영국이나 프랑스는 돌배같이 모양도 맛도 없는 사과로도 시드르를 만드는데, 과실로 먹기 위해 키우는 우리나라 사과로 시드르를 만들면 얼마나 맛있겠어요. 점차 시드르 문화 풍토가 조성되어 가는 일본처럼, 까미노가 작은 역할이라도 해서 양구에서부터라도 시드르 문화가 조성되었으면 좋겠어요.”라고 이야기합니다.
버려지는 파지사과 가공으로 농가에게는 새로운 판로를 제공하고, 유휴인력인 귀촌인에게는 지역에 뿌리 내릴 수 안정적인 생업을 제공하는 일에 더해 건강하고 유쾌한 시드르 음주문화 전파까지 다양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까미노입니다.
까미노가 그리는 그림 안에 담기는 것들 모두가 ‘소외된 것’들이라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자본주의 상품가치로부터 소외된 파지사과, 지역에서의 삶과 소통되지 못하고 소외된 귀촌인들, 오랫동안 버려진 채 방치됐던 공간. 그 모두에게 탁월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까미노가 얼음 동동 띄운 시드르 한 잔마냥 청량하게 느껴지는 초여름입니다.
cafe CAMINO
양구군 남면 국토정중앙로 126(국토정중앙천문대 전방 70m 빨간 기둥 건물)
인스타그램 : camino_cid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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